광해는 폭군이 아니였다.그의 대외정책은 결코 친명배금도 아니였다..
그러나 그는 친명배금이라는 말과 폐륜으로 신하들에게 쫒겨났다.
인조,삼전도의 굴욕 ,정묘호란.. 그의 대외정책은 잘못됬다.
인조의 부도덕한 시작
1623,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남은 조선 후기 역사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인조반정은 당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보다 앞세웠고,
그뒤, 반정 세력들의 부도덕한 행위때문에 민심이 무척이나 흉흉했다.
인조반정이 부도덕함을 알수있는 명나라의 대신 팽곤화가 올린 상소문
광해군은 수십여년 동안 충순한 신하였습니다.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조카에 의해 폐위됬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어찌 난을 일으킨 무군지인(인조)를 돕겠습니까?
반정 세력들의 부도덕한 행위
반정세력들은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의 토지를 일종의 '전리품'으로 간주해 나눠먹었다.
폐주 때 또한 권문세가에서 백성들의 토지를 차지하는 사례들도 많았다. 반정 후 빼앗긴 자들은 모두 돌려받을것을 기대했으나 "국가의 귀속시키거나 공신에게 분배한다" 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에 당시 민심을 잘 보여주는 상시가에 실린 시 내용이다.
아,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마라
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전답을 점하고
그의 말은 타고
그의 일을 행하니
너희들이 그들과
과연 다를 게 뭔가..
인조의 대외 정책
인조 정권은 모든 문제를 명나라에 보고하겠다는 '친명'의 원칙만 다를 뿐, 기미책을 바탕으로 한 후금대책은 그대로 유지했던 셈이다.이러한 방향은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인조 5년까지 지속되고,결국 병자호란,삼전도의 굴욕을 가져왔다.
이로써 인조는 현재까지 조선 최악의 어리석은 군주로 평가 받는다..
참고-조선의 왕과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조선왕조실록)
역사서를 뒤져가며 찾아 알기쉽게 목록별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2015년 이전의 글 > 동아시아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황후에 나오는 타환은 실제 인물?/실제 사진 (0) | 2014.03.25 |
---|---|
정조의 업적과 개혁정치 (0) | 2014.03.20 |
영조의 업적 /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 / 탕평책이란? (4) | 2014.03.16 |
광해군의 업적/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다. (2) | 2014.02.26 |
조선건국은 사실 정몽주로부터 시작됬다. (0) | 2014.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