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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전의 글/동아시아 고전

중상학파(북학파) 실학자들의 업적과 주장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과 기술 혁신의 중요성을 알고 상공업 육성 방안을 제시했던 사람들을 중상학파라고 한다.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던 중농학파 학자들과 달리 중상학파 학자들은 한양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일생을 보냈다.


조선 후기 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청에 다녀온 학자들과 관리가 많았는데 그들은 청의 문물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발전시키면 나라가 부강해져 농민들의 생활또한 나아질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유수원(柳壽垣, 1694~1755)

상공업 중심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을 제시하다.


그는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이고 직업의 사회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반들도 농업 공업 상업의 전업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대상인이 학교와 교량을 건설하는 등 여러 방위시설을 구축해야 되고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의 주장은 오늘날의 투자, 개발 사업과 무척 비슷할 정도로 흠잡을때가 없었다.

그는 귀가 안들린다는 장애가 있었음에도 조선사회의 문제점들, 상업업 개혁론 등을 정확히 나타냈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년)


박지원은 상공업 진흥을 위해 수레,선박,화폐를 이용하여 상품 유통을 활발히 할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그는 물레방아, 수레, 베틀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그는 북경에 있는동안 청나라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몽골과 티베트 학자들까지 만나면서 새로운 충격적인 문화를 알게 되었고 그렇게해서 나온 파격적이고 해학적인 작풍이 그유명한 열하일기다.

또한 중국식 선진문물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북경에 있을때 보았던 중국식 건물들을 지었다.

당시 청=오랑케 라는 사상으로 선진국의 선진 제도를 무조건 배척하는 세태를 비판하였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박지원은 아버지 박형의 세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서얼이였다. 그러하여 과거시험도 못보고 관직 진출의 제한이 있었으나 글을 좋아하는 박제가를 끝까지 뒷바라지 해준 어머니의 노력으로 학문의 전념할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서얼들과 자주 만나 북학을 뜻하는 백탑에서 문학 모임을 갖기도 하였고.

당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조선 지식인들에게 호기심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는데 그는 중국을 4번이나 갈정도로 북학파중에서 중국을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특히 청나라에는 서얼의 차별이 없어서 그는 청에서의 연구를 통해 북학의를 완성하였다. 

북학의에서 그는 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생산을 위해 절약보다는 소비를 권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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