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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전의 글/동아시아 고전

조선시대 천주교의 박해와 탄압, 그 이유


천주교는 17세기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에 의해 서양학문의 하나로 소개되어 서학이라고 불린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




왜 그들은 천주교를 믿고 싶었나.



            김대건 신부                                  예배하는 신자들의 모습

이승훈이 중국에 가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성당을 열고 미사를 주관한 이후, 천주교는 점점 멀리 퍼져나갔다. 

그 당시에는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자 새로운 사상의 도입을 원하는 사람도 많았고 

그보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의 왕실의 외척 세력들이 비변사와 주요관직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 속에서 인간을 모두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논리가 당시 신자들을 마음을 고정시켰고 당시 정권에서 밀린 남인세력의 마음을 끌어 들였다.




천주교는 왜그렇게 박해 받았는가


_18세기 말 천주교 신자중 하나였던 윤지층은 천주교 교리상 맞지 않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_이에 불효한 윤자층을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학자들에 의해 일어났고,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였다.

_처음부터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탄압하진 않았다. 정조 때는 심하지 않았던 천주교 박해가 순조가 즉위하자 당시 노론 세력들이 반대파인 남인세력들은 제거하는 수단으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모두 내쫒았다.

그리고 세도 정권은 순조 1년 신유박해때 이승훈 이기환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 등 반대파를 몰아내었다.


또, 천주교에 대한 정권의 박해가 심해지자 조선이 천주교 박해를 멈추도록 외국 군대를 동원해 달라는 황사영이 보낸 편지가 발각되면서 더욱 박해는 심해졌다.



병인양요/


1939넌 기해박해 때는 서양인 신부 3명을 포합해 100명 사망

1866년 병인박해때는 와국인 신부 9명을 포함한 수천 명의 신도가 처형된일이

우리나라 문화재의 큰 파손과 도난을 입어 알려진 병인양요를 불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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