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갑신정변에 대해 알아보기 앞서 그 배경을 알려면 개화파에 대해 알아야 되는데,
조선후기 이미 주변나라는 근대화 되가고 세계관은 달라지고 있을때 일본은 먼저 근대화를
이루어 조선에게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였는데
개화파란?
이러한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다잡고자 하고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하여 조선후기 북학파의 실학자들의 사상을 계승하여 개화사상을 발전시킨 세력을 개화파라고 한다.
이 개화파는 둘로 나뉘는데 급진 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이다. 이 중 급진 개화파는 서양의 기술 뿐만아닌 근대적 제도까지 받아들이는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김옥균,박영효가 있다.갑신정변의 주역은 이들이다.
박영효 김옥균
더 이상은 못참겠다는 급진개화파
임오군란(차별 받던 구식 군대가 일으킨 난: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 이후 청의 간섭, 자금 부족 등으로 개화정책이 절실하였으나 민씨 정권은 소극적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일본으로 부터의 차관 도입에 실패하여 급진개화파의 세력이 축소되었다 급진 개화파들은 이에 대하여 많은 불만을 가졌다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다
불만을 가진 급진개화파 들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킨 후 정권을 장악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개혁정강을 공포하였다.. 이들의 개화 모델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었던 만큼 청의 간섭이 심했었는데 역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마자 청의 무력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했다.
갑신정변 때 발표된 14개조의 개혁 정강 우정총국
개혁에 힘썼지만 믿었던 일본에게 배신 당하다.
청이 개입 할 경우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근은 철수해버리고 3일만에 실패했다.
김옥균 등은 일존으로 망명을 갔고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고 조선 안에서 일본과 청의 세력다툼이 증가하였다.
또 일본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일본은 이 구실로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청과 일본은
텐진조약을 맺어 청-일 양궁은 조선에 군대 파견시 미리 알리기로 약속했다.
갑신 정변의 의의와 나의 생각
갑신정변은 최초로 근대적 개혁을 실시하였다는 의의가 있었지만 일본에게 기울어져있었다는게 문제였다. 결국 일본의 도움도 받지못하고 오히려 배상금만 물게 되었다는 점에서 아쉽다. 만약 이 정변이 토지제도에 신경을 조금더 쓰고 일본에게 지나치게 의존을 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근대화는 더욱 빨리 일어나지 않았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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