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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전의 글/동아시아 고전

흥선대원군의 업적, 그의 정책은 잘못됬나? (나의 평가)



조선시대에는 대원군이 4명이 있었다. 선조 아버지의 덕흥대원군과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과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다. 

덕흥대원군과 전계대원군과 정원대원군은 아들이 왕이 되기전에 죽어 사실상 왕의 아버지의 역할로서 정치를 한 대원군은 흥성대원군 밖에 없다. 


그는 10년간 아들대신 정치를 하였는데 그 10년은 국제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기에 흥선대원군이 위탁통치한 10년은 중요한 시기였다.



그의 업적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1820 ~ 1898] 


서원과 비변사를 철폐


당시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을 당시 조선은 안동김씨와 같은 세력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주요 권력기관인 비변사를 차지하고 있고, 각종 부패들로 가득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바로하고자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키고 삼군부를 두어 인재가 당색과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도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로 가득하였고 양반 토호들이 발호를 두둔하는 기관 이었던 서원을 철폐하였는데 영조,정조때에도 확실히 건드릴 수 없었던 수백개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페하였다. 이로써 백성들의 세금은 더이상 서원으로 빠져나가지 않았고 이로써 국가 재정도 확립할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법전 간행



19기 변화 된 사회에 맞는 법전들이 필요하다 하여 대전회통 육전조례 양전편고 등 여러 법전을 강행하였다. 



양반도 세금을 내도록 하다.

19세기, 조세와 환곡제도 그리고 군포에 대한 세금 부과 이렇게 세가지의 문란을 삼정*(군정, 전정 ,환정)의 문란이라 하였는데 이 문제를 흥선대원군은 심각히 받아 들여 기존에 있던 환곡제도를 폐지하고 마을단위로 빌려주고 걷게하는 사창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에게 경제적으로 안정을 주었고, 세금을 걷는 문제인 군정과 전정에 대하여 흥선대원군은 호포제와 군포제를 실시하여 양반도 세금을 내도록 하였다. 당시 양반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이렇게 올바른 개혁정치에 당시 조선의 조화가 이루어졌고 백성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과연 옳았나?


천주교 탄압

병인박해 (왼쪽)                신미양요, 미국의 콜로라도호(오른쪽)


이 또한 왕권을 가로막는 천주교의 교리를 막고 유교사상을 확립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탄압으로 인하여 두번의 양요(신미양요 병인양요)를 불러들였다.

이 두번의 양요때문에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재 다수를 잃었다.


경복궁 재건축

그는 왕권광화를 위해 경봉국을 재건축 하였지만 이것이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고 이를 짓기위하여 내놓은 원납전과 당백전 때문에 경제구조가 흐트러졌다.




흥선대원군의 외교정책과 나의 평가


그의 외교는 쇄국정책가 중심되었다. 그는 조선의 자주성을 지켰다는 의의가 있지만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었고 빠른 변하는 세계에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었다척화비를 세워서 까지라도 단행하였던 그의 정책이 당시 조선사회에 옳았지만 앞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더욱 조선사회를 발전 시키는 것도 필요했다. 35년간 우리는 지배하였던 일본,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개방'을 해서였다. 그의 외교정책이 개방적이고 그놈의 성리학과 유교를 좀 줄였다면 더 빨리 근대화를 이루고 더욱 강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도 건들기 힘들었던 세도정치를 단칼에 정리하고 백성들을 부자들의 수탈로 부터 경제적으로 안정을 주었지만 국외정책은 잘못하였다는게 내 생각이다.


제가 이글을 쓰는데는 2시간 정도의 시간이 넘게 필요하지만 추천은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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